본문 바로가기

HOME 자료실치료자료실

치료자료실

치료자료실 보기
볼비의 생애를 통해 본 애착 이해(미술1)
치료자료실 보기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19.01.07 조회수 : 278

장애아동지원센터치료연구사업-치료소개

 

  

 

볼비의 생애를 통해 본 애착 이해

 

 

1. 도입

당대 유명한 아동심리학자인 볼비를 통해 그 이전 정신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던, 6세 이전 아동기 경험이 병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유일한 이유인 것처럼 설명되어졌던 학문에 대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아동기 경험에 대해 부모가 과도하게 반성적인 태도로 매달리지 않는 것이 좋겠고 아동의 전생애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한다.

 

2. 볼비의 어린시절

볼비는 1907226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저널리스트였고 아버지 앤쏘니 볼비 경은 성공한 외과의사였다. 어머니 메이 모스틴은 헌팅톤셔 마을의 가게 점원의 딸이었다. 형제 자매는 모두 6명 이었으며 볼비의 부모님은 애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약간 차가운 분들이었다. 어려서 볼비는 집안의 침울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무척 노력했다고 한다. 볼비의 부인 어술러 볼비는 존 볼비가 이런 가정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대신 어린 볼비에게는 사랑이 넘치는 미니라는 유모가 있었고 더 자란 후에는 내나 프렌드 라는 총명한 가정교사가 있었다. 이들이 존 볼비에게는 제2의 애착인물이었던 것 같다.

폴린 머리 파크스는 볼비의 어린시절 그의 가정에는 애정이 풍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인지를 포함한 어떠한 측면에서도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인생에 미친 다양한 영향력이 어떻게 그의 성품에 통합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14년 볼비가 7세 때 전쟁이 일어났다. 그와 그의 형은 학교 기숙사에 보내졌고 그는 이 학교의 분위기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나 지적 발달은 손상되지 않았고 공부도 그럭저럭 잘한 편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해군장교가 되었고, 1925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 자연과학과 심리학에 관한 책을 읽었으며 이때 오늘날 발달심리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존 볼비는 1년 동안 가정집처럼 운영되는 부적응아 발달학교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는 아동의 행동장애와 가족 역기능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발견하였다. 이때부터 아동기의 실제 경험이 병리적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고 사실상 이 아이디어가 애착이론의 핵심이었다. 부적응아 발달 학교에서 볼비는 존 앨포드라는 자원봉사자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는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존 볼비에게 의학공부와 정신분석을 병행하도록 충고하곤 했으며 이 충고는 존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볼비의 나이 22세에 런던으로 가서 의학공부를 시작했고 조언 리비에르에게 분석을 받고 멜라니 클라인에게 수퍼비전을 받으며 정신분석 훈련에 입문하였다. 1935년에 볼비는 멜라닌 클라인의 논문을 반박하기 위해 우울증 환자 관련 연구를 내 놓았는데 이는 환자들이 최근 사별을 겪으며 우울증이 나타났다는 보고로, 정신병리가 실제 생활사건보다 무의식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당시의 정설을 벗어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볼비는 당대의 정신분석학의 거장이었던 클라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3. 볼비의 공동체 생활이 주는 의미

1938년 존 볼비는 어슐러 롱스태프와 결혼하고 4명의 자녀을 두었다. 결혼하지 전 볼비는 정신분석 훈련에 전 재산을 투자하여 그의 수입은 그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존과 어슐러는 비용을 절약하고 친목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들과 한 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모두 중도성향의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정의와 평등을 옹호했지만 극좌파도 극우파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전쟁 후(1946~1947) 볼비는 햄스태트에 집을 샀고 그는 이 집에서 생을 마쳤고 그의 부인과 다른 친구들은 아직도 이 집에 살고 있다. 존과 어슐러는 공동체 생활을 좋아했다. 이들의 집에 혹은 근처에는 항상 친구들과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어슐러 볼비는 이를 일종의 확대가족이라고 말하곤 했다.

볼비는 일대일 애착과 집단적 애착 모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두 가지 애착의 주된 기능은 안전한 협조이며 궁극적으로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동년배와 어울리거나 집단에 참여하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하다. 이러한 관계 중에서 상호의존적이고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가 많을수록 가까운 관계가 되는데 이는 기계적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며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고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복잡한 의미를 지닌 표상의 형태로 내면화하게 된다.

 

4. 볼비이론의 발전

아동을 치료하면서 볼비는 정신병리의 원천이 실제 대인관계 경험이라고 확신했는데 이는 순수한 심리적 과정과 무의식이 병리의 원천이라고 한 클라인의 견해와 상반된 것이었다. 볼비는 아동에게 신경증이 나타났다면, 아이의 엄마는 어린 시절 자기 부모에게 품었던 적개감을 부모가 된 지금 자녀에게 표출하고 자기 부모가 충족시켜주지 않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녀에게 부적절하면서도 비정상적인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때부터 볼비는 가족 간 상호작용과 정신병리의 대물림 현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볼비의 주된 관심사는 어린 자녀와 양육자 사이에 형성된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애착관계의 본질과 추이였다. 볼비는 정신분석학에서 출발했지만 발달심리학과 행동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했다.

 

5. 2차 세계대전 이후 애착이론의 발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볼비는 아동발달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이때 연구로 아동이 출생 직후 부모로부터 받은 보살핌의 질이 차후 정신건강의 토대가 되며, 부모로부터 따뜻하고 친밀하고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은 영아 혹은 유아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부모역할을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이지만 아버지, 다른 식구들 혹은 대리부모도 부모역할을 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6. 말년의 볼비

1972년 볼비는 60세의 나이로 정신건강연구소를 은퇴하였다. 그는 타비스톡 클리닉의 명예 이사로 남아 있었고 학술적 연구를 계속 해나갔으며 많은 임상가에게 수퍼비젼을 해주었다. 볼비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을지라도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가치있는 연구를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말년에 볼비는 영국과 미국 학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1982(75)에 런던대학에서 프로이드 메모리얼 정신분석학 교수가 되었고, 1987년 볼비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타비스톡 클리닉에서는 애착이론의 결실:전 생애에 걸친 애착이라는 제목의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90(83) 찰스 다윈의 자서전을 출판하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다.

존 볼비에게는 사망 직전까지 39년간 그를 도와 준 도로시 서던이라는 비서가 있었다. 1994년에 사망한 그녀에 대해 아내 어슐러 볼비는 도로시는 볼비의 인생에서 특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볼비의 모든 악필을 활자로 옮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볼비의 안전기지였다고 회상했다.

 

 

 

 

출처 : 마리오 마론(2004), 애착이론과 심리치료, 이민희 역. 서울:시그마프레스


첨부파일 :
  목록